자원봉사신청

자원봉사 신청 & 절차

"자원봉사는 삶의 자양분입니다."

민간주도 전국 최대 단일 자원 봉사단 한국 자원봉사관리협회입니다.

열정 , 참여 , 보람 , 행복 , 사랑 , 축복 , 나눔! 이 모든 말들이 자원봉사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관광통역안내사 자원해설 복습용 메모 줍줍


작성자 Monet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4-08-30 15:12

부산고구려$ 2023년 6월경에 단재 신채호를 찾아서란 주제로 중국 답사를 다녀왔다. 당시에는 코로나19여파로 인해 단체비자를 받는데도 참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비자센터에 가서 여행사에 신상명세서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를 낸 것을 가지고 직접 방문하여 서류를 접수하는데도 시간이 소요가 많이 되었다. 또한, 출발하기전 인천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여러가지 설문에 답을 하고 승인을 받아야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래도 윤동주 생가와 백두산 천지를 본다는 기대로 벅찬 가슴을 안고 갔다. 그런데 기대한만큼 우리를 이끌어주는 가이드부터 여러가지가 실망으로 다가왔다. 윤동주의 생가를 들어가지도 못하고 백두산에 아예 오르지도 못하는 등등... 여러가지로 내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 후로 1년이 금방 지나갔다. 그동안 평소에 일도, 공부도 하면서 답사를 다니고 서해랑길 등등.. 길이 있는 곳이라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시대사황으로 인해 서울과 대전 현충원 투어를 많이 다녔다. 그리고 2024년 들어 봄부터 만주로드 답사 기획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참가 신청을 하였다. 또한 만주로드 참가 일행들과 함께 사전 답사로 안동과 부산, 밀양을 다니면서 공부도 하면서 마음을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들이 단단하게 다져지고 독립운동가들을 대하는 마음이 어느 누구보다도 깊고 뜨겁고 우리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40명이라는 단체가 가는데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특히 우리를 이끌어주는 김기자의 열정은 하늘 높이 우뚝 솟아서 만주벌판을 모두 아우르며 부산고구려$ 독립운동가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불태워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답사내내 그가 이끌어주는대로 따랐고 그로인해 행복한 일정들이 저절로 스며들어왔다. 7박8일동안의 일정속에 함께 해준 기자님, 언변이 좋고 뛰어난 지식과 정성스런 마음으로 한개라도 더전해주려는 중국에 가이드 두분, 편안하게 안전을 책임지신 운전기사님 그리고 함께 했던 선생님들에게 가슴깊이 감사를 드릴뿐이다. 답사를 떠나기 전에 날씨를 검색하는데 8월11일부터18일까지 온통 비,구름 뿐이었다. 우중답사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따라서 기대보다는 순리대로 따르며 비가 오면 비가오는데로 다 괜찮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가벼웠다. 다만, 우비 2개와 우산 2개 그리고 옷을 많이 챙기며 대비를 하였다. 그런데 7박8일 동안의 답사 내내 노곤한 몸을 쉬며 꿈나라에 있는 밤에만 비가 내리고 낮에는 햇빛이 쨍쨍하고 흰 구름과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이어졌다. 그러므로 생각지도 않았던 일정들이 퍼팩트하게, 이보다 더 좋을수 없다 라는 표현이 걸맞게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인천에서 아시아나 항공으로 출발하여 하얼빈, 두만간, 훈춘, 연길, 용정, 백두산, 국내성, 단동, 압록강, 뤼신, 다롄을 거쳐 대한항공으로 돌아오는 7박8일간의 일정은 3,600킬로이다.인천에서 오후 3시경에 아시아나항공으로 출발해서 하얼빈공항에 도착하기 전 모습하얼빈 공항에 착륙하기 전에 모습을 비행기 창으로 통해서 보니, 비가 많이 내려서 농토가 잠기고 마을 곳곳도 잠기고 물이 가득한 모습을 보았다. 사전에 검색한 결과,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하더니 부산고구려$ 정말 사실이구나! 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얼빈에는 처음인데 처음 보는 광경이 비로 인해 살고 있는 분들에게 더이상 해가 없기를 바랬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넓은 모습이 눈에 들어와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오면서 마음에 들었다.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신전같은 모습의 하얼빈 타이핑 공항 하얼빈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731부대기념관으로 가기 위해 관광버스에 오르기 전 바라본 하얼빈 공항의 모습은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우람하고 단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찍은 사진은 2013년에 T1터미널(국제선 전용 터미널) 옆에 T2 터미널(국내선 전용 터미널)을 건설한 곳이다. 두 터미널의 실내 공간은 연결 되어 있어서 한건물로 본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하얼빈 공항은 하얼빈은 북경보다 표준어를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아나운서가 하얼빈 출신들이 가장 많다고 한다. 하얼빈은 부성급시이자 중국 헤이룽장성의 성도로 쑹화강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공업도시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로 만주 지방의 정치, 경제, 광학, 문화, 통신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2020년 11월 1일로 천만명으로 면적은 53,795제곱필로미터이다. 작은 동방의 모스크바라고 불린다. 중국에서 통양이 가장 풍부하며 식량과 직물 관련 농작물을 재배하는 곳이다. 옥수수밭이 끝이 없이 자라고 벼농사와 콩 농사가 많고 중국 땅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중국의 동쪽에 위치에 있고 중국에서 하얼빈이 인기 있는 도시라고 한다. 천연 자원이 풍부하고 편리한 교통 시스템, 인력 자원이 풍부하다. 부산고구려$ 대체로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대륙에서 불어오는 영향으로 매우 추운 편에 속한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겨울이 6개월이고 -35도로 내려가서 얼음 축제가 유명하다고 한다. 1월 최저 기온은 -23.9도, 평균 최고 기온은 -12.3도이고 7월 평균 최저기온은 18.3, 평균 최고 기온은 28도이다. 하얼빈은 만주어로 '그물을 말리는 곳'을 뜻한다. 본래 부여에 속하였으며 고구려와 발해가 있었던 곳이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생여진이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정착하여 금나라를 세웠다. 금나라가 중도로 수도를 옮긴 후 멸망하면서 잊혀졌다. 도시가 건설 된 것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블라디보스코크까지 연장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면서이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6개 영사관이 개설되면서 공장과 기업, 은행이 세워지면서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내전에서 패한 백군이 이 도시로 피난오면서 러시아식 학교와 러시아신문도 발행되어 러시아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1935년 둥칭철도가 일본에게 팔린후 1946년 이후 러시아인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되돌아갔고 다른 나라도 모국으로 돌아갔다.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일본군은 1932년 2월 4일부터 하얼빈에 진주하였지만 1945년 8월 20일에는 소련군이 하얼빈을 점령하였다. 이후 1946년 4월에 중국인민해방군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 하얼빈의 731부대 기념관 731부대로 이동중에 가이드는 하얼빈공항에서 30분 걸리는데 우리가 늦게 도착했고 731부대에 입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단체전용 통로가 취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731부대에 도착하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부산고구려$ 우려와는 달리 가이드와 관시가 통해서인지 다행히 도착하자마자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기념관에 들어갔다. 나누어 준 수신기를 가지고 들어가니 기념관 안이 어두운 가운데 관람하는 사람도 많았고 한국어로 설명을 해 주어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절실하게 끔찍하게 느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는지 악행을 저지른 일본놈들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기념관을 둘러보면 볼수록 처참하게 생체실험을 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분노도 치밀고 마음이 답답하였다. 731부대는 1936년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동향부대로 불리다가 '731부대'로 개명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 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73부대의 총 책임자인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원래는 태평양 전쟁 전 정치 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 정치적 선전과 일본 군대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다. 731부대는 또한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부대이며 그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부대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이 부대는 중국 헤이롱장성 하얼빈 핑팡에 주둔해 공산주의 정치 선동에 대항해 일했으나, 화확. 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자행한 부대였다. 크게 보면 독일 나치의 SS같은 정치선동 부서로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성, 인종주의 이론, 방첩활동, 정보활동 등을 하며 만주 헌병대, 정보기관, 정규경찰, 일본 비밀 정보기관과 부산고구려$ 긴밀히 연락하였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1만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이 이 부대의 실험 대상이었다. 이 부대에서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에 의해 연구된 생물학 무기의 사용으로 수만 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731부대는 일본제국이 세운 생물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516부대, 543부대 외에 7개 부대 등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 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일제의 헌병대가 관리하였다. 이시이 부대와 와카마쓰부대를 합쳐서 1941년부터 '관동군 방역 급수부'또는 '731부대'로 불린다.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였고 임산부까지 동원 되고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고 수천 명의 수용소의 사람들은 생체 해부의 대상이 되었으며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또한, 출혈의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다리를 절달하였고 절단된 팔이나 다리를 수용자의반대편에 다시 봉합하는 실험도 진행되었다. 또한 팔이나 다리를 얼려서 절단하였는데 다시 녹여져 치료받지 않은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에 사용되었다. 일본 제국의 외과의사였던 유아사 켄은 생체실험은 731부대의 밖에서도 행해졌으며 중국 대륙에서의 실험에 약 1000명의 일본군이 관여되었다고 하였다.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고 연구하고 수용자들은 간수 등에게 간당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시이시로 중장이 개발한 도자기 폭탄으로 인해 흑사병,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명의 중국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31부대와 부산고구려$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나중에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731 부대의 활동은 유엔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다. 전후 미국은 사법거래를 통해 생체실험을 통해 나온 자료를 얻었고 이시이 시로는 면죄부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심득용, 이청천, 고창률,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김안동, 김성배가 생체실험을 당한 곳이라고 하니 가슴이 탁 막히고 무겁기만 했다.동상실험실 옛터하얼빈 시내에서 첫 식사를 하였다. 23년에도 중국 답사 중에 식당에 따뜻한 차가 없었는데 요번에도 마찬가지이다. 6년전에는 식당마다 따뜻한 차가 식탁에 올라 있어서 식사전에 즐겨 마셨는데 없어서 아쉬웠다. 음식은 먹을만하였다.1907년에 건축된 비잔틴 양식의 러시아 정교회 성소피아성당 저녁을 먹고 도착한 성소피아 성당앞에는 사람들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화장을 진하게 하고 공주 옷을 화려하게 입고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해서 이상야릇하고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2017년에 러시아를 가서 예쁜 성당을 많이 보았었는데 당시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하얼빈에 와서 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성당주변에는 공주옷을 대여해 주는 곳도 많은것을 보니 우리나라 궁궐 주변에 한복을 대여해주는 곳이 많은것과 통하는 것 같다. 재정러시아 시대 때 러시아 군대가 하얼빈에 들어논 러시아 병사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러시아 정부에서 세운 것이라고 부산고구려$ 한다. 나중에 구간을 확장해서 1930년대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은 전 세계에 3개가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이스탄불 그리고 여기 하얼빈에 있다.하얼빈 조린공원내에 있는 안중근 글씨가 새겨진 청초당 조린공원은 하얼빈시 최초로 조성(1906)되어 ‘하얼빈 공원’으로 불리다가 공원이 여러 개 생겨나자 구역명칭 도리(道里)를 따서 '도리공원'으로 개칭하고, 일제가 물러가자 ‘스탈린공원’으로, 이듬해 다시 ‘조린공원’으로 바뀌었다.일본이 태평양전쟁(1941~1945)에 패하고 물러가자 중국 정부는 항일 영웅이었던 이조린(李兆麟) 장군 유해를를공원에 안장하고 장례식을 치렀으며, 1946년 공식으로 ‘조린공원’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벼루의 앞쪽 움푹 파인 부분을 '못'으로 표현한 '硯池'는 '검은 연못'을, '靑草塘'은 '푸른 연못'을 의미한다. 비석에 새겨진 '硯池'와 '靑草塘“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죽어서도 조국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해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고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가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남근 유언조린공원내에 설치된 안중근의 글씨인 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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